“나는 교육을 못 받은 사람들을 매우 좋아합니다.” 도널드 트럼프가 2월 승리연설에서 한 말이었고 그는 반복해서 미국 엘리트들과 “그들의 그릇된 세계화주의 타령“을 겨냥했습니다. 영국유권자들은 브렉시트(영국의 EU탈퇴)운동자들이 통제가 안되는 이민자들, ”국민의 뜻과 무관한 엘리트들“ 그리고 ”(잘난) 전문가“가 망쳐놓고 있는 것이 분명한 나라의 통제권을 되돌려 놔야 한다는 주장을 마음에 새기면서 유럽통합의 50년 역사를 뒤집어 놓았습니다.
서유럽 국가들과 이스라엘, 러시아, 폴란드 그리고 헝가리는 민족, 종교 국가주체성에 대한 선동적인 주장들로 들끓고 있습니다.
힌두 지상주의자들은 Rush Limbaugh가 “골빈 진보주의자들”이란 유명한 경멸 섞인 별칭으로 진보적이고 세속적인 엘리트들에 대한 분노의 화살을 정당화하는 걸 답습해왔습니다. 18세기 전 인류를 아우르는 문명이란 대모험은 합리적인 자기이익 추구, 상업, 사치, 예술, 그리고 과학과 조화를 이뤘고 볼테르, 몽테스키외, 아담 스미스 등등에 의해 형성된 이런 계몽은 혼란스럽게도 세계적 근대화에 대한 전세계적인 반감이란 뜻밖의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저 세상에서 현재 우리들의 곤경을 지켜보는 계몽사상가들 중 “거봐, 내가 뭐랬어.”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보다도 장자크 루소이며 그는 괴짜스럽고 까칠한 독학 철학자로 제네바 출신이며 그에 대해 Isaiah Berlin가 남긴 기억에 남는 묘사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무지랭이 싸움꾼”입니다. 루소의 주요 저서들은 1750년대에 시작되었는데 세계적 허영에 대해 지겨움, 과학기술 관료들과 국제무역에 대한 불신, 그리고 전통적인 대다수 사람들에 대한 옹호로 넘쳐납니다.
볼테르는 루소와 오랫동안 과격한 적개심을 주고 받으며 그를 풍자하길 “부자들이 가난한 사람들한테 다 뺏기는 걸 봐야, 더 나아가 남자들의 친목연합을 구축해야 속 시원해 할 부랑자”라 했습니다. 냉전시대동안, Berlin과 Jacob Talmon 같은 비평가들은 루소를 전체주의 예언자로 보았습니다. 이제 서양의 대규모 중산층들의 경기는 침체되고 그 밖의 다른 곳에서 수십억명이 가난을 벗어나며 이루어질 수 없는 번영이란 꿈을 꾸면서 루소는 불평등이란 심리적 결과에 집착하며 더욱더 예언적이고 분란을 일으키는 듯 합니다.
루소는 내면적 근대화 경험의 본질을 묘사하길: 이방인이 되는 것이라 했습니다. 그가 파이에 온 건 1740년대였고 30세였던 그는 고립된 방관자로 질투, 매혹, 혐오, 그리고 거부라는 복잡한 감정들과 싸워왔는데 이는 자기도취에 빠진 한 엘리트에 의해 도발된 것이었습니다. 프랑스에서 동료들에게 조롱받은 그는 유럽전역에 걸쳐 신랄한 독자들을 찾았습니다. Johann Gottlieb Fichte 그리고 Johann Gottfried von Herder와 같은 젊은 독일 지방출신들은 각각 경제 그리고 문화 민족주의 창시자들로 세계적 보편주의자들에 대한 반감으로 들끓었습니다. 여러 소도시 혁명가들이 Robespierre부터 시작해서 다들 영향을 받은, 루소가 제시하는 희망은 그의 책 “사회계약” (1762)에 윤곽이 잡혀있습니다—새로운 정치구조가 불평등하고 상업적인 사회의 병폐를 고칠 수 있다.
지난 10년간, 많은 책들이 루소의 중심적 역할과 독특함을 옹호했습니다. Leo Damrosch의 전기, “쉼없는 천재” (2005)는 루소를 “그의 시대에 가장 독창적인 천재”라고—정말 독창적이라 그 시대 대다수 사람들이 그의 생각이 얼마나 강력한지 식별할 수조차 없었다고 했습니다. 작년에 István Hont가 “상업적 사회”라는 루소와 아담 스미스에 대한 비교연구에서 말하길 우리는 루소의 두려움과 우려에서 그다지 벗어나 있지 않다고 합니다: 자기 이익만 추구하는 개인들로 채워진 사회는 반드시 기본 도덕성이 결여되게 된다는 겁니다. Heinrich Meier가 그의 새 책 “철학적 삶의 행복” (Chicago)에서 제시한 루소 사상에 대한 개요의 출처는 루소의 마지막이자 미완성본인 “고독한 산책가에 대한 환상”이란 책으로 1776년에 집필을 시작했는데 2년 후 사망했습니다. “환상”에서 루소가 정치적 설명에서 벗어나 발전시킨 그의 신념은 “자유는 어떤 정부의 형태에도 내재되어 있지 않고 오직 자유인의 마음에만 있다.”였습니다.
루소가 현재 우리들의 정치를 재구성하는 엘리트주의 혐오의 중심 인물같다면 그가 가치체계 형성의 시대에 존재했기 때문입니다—그가 “과학, 예술, 사치, 상업, 법”이라 부른 것에서의 계몽신념은 서양 문화 그리고 결과적으로 세계문화의 성격까지도 바꿔버렸습니다. 그 새로운 사상은 전반적으로 지식층에게 득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루소가 그 속에서 드물게 혹평가가 된 최소한의 일부 원인은 프랑스 계몽의 중심지였던 파리 살롱에서 되었는데 루소는 자리를 잡을 수 없는 환경이었습니다.
루소는 정규교육을 겨의 받지 않았지만 주로 관리되지 않았던 어린시절과 처소년기에 많은 경험을 쌓았습니다. 1712년 제네바에서 힘들게 사는 시계공과 출산직후 사망한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그는 10살밖에 안 되었을 때 냉담한 친척에 맡겨지며 고향을 떠났습니다. 15세에 도망친 그는 사보이로 가서 스위스계 프랑스인 귀족부인의 정부가 되었습니다. 그가 평생을 사랑한 그녀는 그에게 책과 음악을 알게 해줬습니다. 루소는 항상 자신의 어머니를 대신할 사람을 찾아왔기에 그녀를 엄마라 불렀습니다.
파리에 도착할 무렵 그는 이미 유럽전역에서 다양한 하급재능들을 쌓아왔습니다: 제네바에선 견습 목판공, 토리노에선 급사, 리옹에선 개인교사, 베니스에선 비서. Damrosch는 “그는 이런 경험들로 불평등을 분석하는데 권위가 생겼다”고 서술했습니다. 파리로 와서 얼마 안 되어 문맹에 가까운 세탁부와 교제하며 5명의 아이들을 낳았고 살롱 사회에 일시적으로 첫 진출했습니다. 가장 먼저 알게 된 지인들중의 한 명은 Denis Diderot이란 동년배 지방출신으로 그는 그 10년간의 비교적 자유로운 지적 풍조를 최대한 활용하는데 집중했습니다. 1751년 Diderot가 착수한 “백과사전”에서 종합한 프랑스 계몽의 핵심 사항들은 Buffon의 “자연스런 역사”(1749) 그리고 몽테스키외의 거대한 영향력을 가진 “법정신” (1748)같은 겁니다. 그 백과사전은 계몽운동의 주장을 확고히 했습니다: 인간세사에 대한 지식과 그 근본적인 원리의 규명은 진보의 길을 닦을 것이라는 겁니다. “백과사전”의 다작 기여자로서 거의 400개의 글들을 대부분 정치와 음악에 관해 실은 루소는 예술과 과학에 중요한 자유를 되돌려 준다는 제일 중요한 이유를 확립하기 위한 총체적 노력의 일환으로 참여한 듯 하다고 Diderot 는 서술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견해는 변하고 있었습니다. 1749년 10월의 어느 오후, 루소는 파리외곽에 있는 한 요새로 여행을 갔는데 그곳에선 Diderot가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소논문으로 표현의 자유의 한계를 시험했다가 몇 달을 복역중이었습니다. 가는 길에 신문을 읽다가 루소는 에세이경합에 대한 광고를 봤습니다. 주제는 “과학과 예술의 진보가 도덕성을 무너뜨렸는가 개선시켰는가?” 1782년에 발표된 그의 “고백”이 첫 현대식 자서전인가는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그 글에서 루소는 “내가 이걸 읽는 순간 새로운 우주를 보고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고 묘사했습니다. 길가에 앉아서 꿈결에 한 시간을 눈물로 코트를 적시 게 한 깨달음은 진보가, 계몽철학자들이 그 교화 및 해방효과에 말하는 것과는 달리, 새로운 형태의 노예화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었다고 주장했습니다.
루소는 그의 통찰을 그렇게 극적으로 받아들인 것 같진 않습니다; 이미 그 전에 자신의 이설을 형성하기 시작했는지도 모릅니다. 상황이 어찌되었건 경합에서 입상하고 1750년에 발표한 그의 첫 철학적 작품 “예술과 과학의 도덕적 효과에 대한 논문”은 극적인 주장들로 넘쳐납니다. “예술과 과학은 인간을 짓누르는 사슬위에 꽃 화환을 덮어씌운 것이다”, 인간의 지식이 증가하는 만큼 “우리 정신도 퇴락해왔다”라고 썼습니다. 18세기 중간까지 파리의 지식인들은 다른 사람들이 따라야 하는 문명의 기준을 세워두었습니다. 루소의 견해로는 새로이 등장한 지식 및 기술계층이 한 거라곤 힘 있고 부당한 사람들을 문학적 그리고 도덕적으로 감싸준 것 밖에 없다는 겁니다.
Diderot는 기쁘게 루소의 반박을 받아들였고 처음엔 그것이 그의 계획에 관한 전쟁선포와 다름없다는 걸 알지 못했습니다. 대부분의 동료들은 과학과 문화로 인류가 기독교, 유대교 그리고 야만적 미신의 유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고 봤습니다. 그들은 신흥 자본층을 격찬했고 그들의 본능적인 자기보존력, 자기이익추구, 그리고 그 과학적, 능력중심주의 정신을 크게 신뢰했습니다. 아담스미스가 예견한 개방적 국제무역시스템의 원동력은 부자들에 대한 시샘과 흠모, 그들의 힘과 특권을 흉내내고 싶은 욕구였습니다. 스미스의 말로는 인간의 모방심리는 긍정적인 도덕적 그리고 사회적 힘이 될 수 있다는 겁니다. 몽테스키외의 생각은 상업이 “과잉을 유용으로 만들고 유용을 필요로”로 만들면서 “파괴적인 편견을 치유”하고 “인간의 의사소통”을 촉진할 거라는 겁니다.
볼테르의 시 “사교계”에서 저자는 멋진 테피스트리와 은제품 그리고 화려한 마차주인으로 유럽의 사치스런 현재를 누리고 종교적인 과거를 비웃는 걸로 묘사합니다. 볼테르는 전형적으로 자기이익을 추구하는 평민으로 상업과 자유를 독단적인 권위와 계급에 대한 해결책으로 권장했습니다. 1720년대 그는 런던에서 시세차이 남기는 투기로 이익을 봤고 주식시장을 세속적인 근대식 성전이라 칭송하며 그곳에선 “유대인, 이슬람인 그리고 기독교인이 같은 믿음을 가지고 서로 거래하기에 이교도란 말은 파산자들에게나 해당되는 단어가 된다”고 했습니다.
사치와 표현의 자유를 열심히 권하면서 볼테르 등등이 명확하고 구체화시킨 삶의 방식은 개인의 자유는 부의 증가와 세련된 지성에서 얻어질 수 있다는 겁니다. 이런 도덕적 지성적 혁명은 오랜 세월동안 왕좌와 제단 앞(정치적, 종교적으로) 복종의 결과로 루소는 이에 반하여 반혁명을 이끌어냈습니다. “금융”이란 말은 “노예의 말”이며 금융시스템의 비밀스런 작용은 “좀도둑과 배신자를 만들어내고 자유와 공공의 이익을 경매대에 올리는 수단”이라고 말했습니다. 오늘날의 브렉시트 옹호자들을 에견하며 주장하길 영국은 그 정치적 경제적 힘에 걸맞지 않는 가짜자유를 국민들에게 준다고 했습니다: “영국인들은 그걸 자유라고 생각하다. 엄청난 자기기만이다; 국회의원선거때만 자유일뿐이다. 선출되자마자 국민들은 노예화되고 아무것도 아닌게 된다.”
거의 20권의 책을 내면서 루소가 증폭시킨 건 지식층과 그들의 부유한 후원층에 대한 반대였는데 그들이 뻔뻔하게도 다른 사람들의 삶에 훈계한다는 것이었다. 루소가 그의 반대자들과 생각을 같이하는 건: 성직자를 등에 업은 폭정과 종교적으로 승인받은 군주제의 시대는 상승하는 평등주의에 의해 대체되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경고한 것은 부, 허영, 겉치레라는 자본층의 가치는 평등, 도덕, 품위, 자유 그리고 긍휼의 성장을 돕기보단 지연시킬 거라는 거였습니다. 부러움과 돈의 힘에 기반한 사회는, 진보를 가져올지는 몰라도, 실제로 사람들은 심리적으로 쇠약해지게 할 거라 믿었습니다.
루소는 개인적 이익들이 상호작용해서 새로운 문명을 이끌어내어 자연스런 조화를 생성할 거라고 믿지 않았습니다. 그의 표현대로 쓰자면 그런 작용에 방해가 되는 건 바로 사회적 인간 혹은 닮고 싶은 자본가들의 영혼에 있다고 합니다: 자기 자신이 남보다 더 인정받게 하려는 끝없는 욕망에 각 개인은 남보다 자신을 더 중시한다는 겁니다. 그들 각각의 재산을 증가시키려는 “갈급함”은 진짜 원해서라기 보다 “남을 능가하고픈 욕구”에서 오기에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종속하려고 들 겁니다. 새로운 계급의 상위권에 있는 일부 행운아들조차 불안정한 상태이며 하위에 있는 사람들의 존경과 공손함을 가장한 시샘과 악의를 받게 될 겁니다. “모두가 타인의 이익이나 명성을 위해 일하는 척”하는 사회에서 남들이 손해를 끼치면서까지 자신을 높이고자할 뿐이기에 폭력, 기만 그리고 배신은 피할 수 없게 됩니다. 루소의 어두운 세계관에 의하면 “신실한 우정, 진실된 존중 그리고 완벽한 확신은 인간들 사이에선 사라집니다. 질투, 의심, 두려움, 냉담, 침묵, 증오, 그리고 사기가 항상 감춰져 있습니다. 이런 비정상적 정신이 현대 사회의 중심에 있는 절망적인 “모순”이었습니다.
루소에 의하면 현대문명은 사람들이 자기가 싫어하는 사람들의 인정을 받고 싶게 해서 와해시킨 “자연인”의 소중한 가치는: 소박한 만족과 자신을 의식하지 않는 자기애. 이런 환경에서 가능한 진정한 자유에 도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우리 내에 있는 위선적이고 고통스럽도록 갈라져 있는 자본가층을 뛰어넘는 겁니다. 루소는 자신이 이런 노력을 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과시적일정도로 엄격하게 자신을 상승욕구있는 사람, 즉 “자유사상가 노릇하는 부류”로부터 분리시켰습니다. “인류 불평등의 기원과 기반에 대한 논문”에서 쓰기를 “넘쳐나는 철학, 인류애와 문명의 한복판에서, 숭고한 도덕규범속에서 우리가 자신에게 보여줄 것이라곤 오직 경박하고 거짓된 외양, 미덕없는 명예, 지혜없는 이성, 그리고 행복없는 쾌락뿐이다.”
지성인들에 대한 루소의 비난에 특별히 더 원한이 섞인 것은 볼테르가 익명의 팸플릿에 루소가 위선적으로 가족의 가치를 옹호한다고 한 사실 때문이었는지 모릅니다: 자신의 다섯아이들을 고아원에 맡긴 사람. 루소의 삶은 순화해서 말하자면 이론과 실제사이에 많은 그런 격차를 보였습니다. 감성에 있어선 전문가였던 그는 어두운 골목길에 숨어 여성에게만 자신을 드러내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자신은 흔하게 하던 충동적인 자위를 자신의 글속에선 엄하게 반대했습니다.
부자들을 적대했던 다른 도덕가들처럼 루소는 가난한 사람들의 상황에는 관심이 그다지 없었습니다. 그는 단지 자신이 사회적 불이익과 가난을 경험해봤기에 - 사실 그다지 가난하지도 않고 부유한 후원자를 찾아내는 요령도 있었습니다 - 자신의 주장이 자신보다 더 혜택보며 살아 온 사람들 주장보다 더 충분히 우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의식에 사로잡힌 많은 사람들처럼 그는 아무도 자신의 고통을 이해하려고 들지 않는다고 확신했습니다. Meier는 난해하지만 정확하고 구미가 당기게 분석하며 지적하길 루소의 마지막 책의 인용문이 그의 첫 책의 인용문과 같다고 합니다: “여기서 내가 야만인인 이유는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해서이다.” 많은 그의 신파조 메모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그 문구야말로 자기연민과 반발로 점철된 지성인으로서의 생활동안 도달한 결론이었습니다. .
하지만 루소가 자신의 사상들을 두려움, 혼란, 외로움과 상실이라는 익숙한 경험에서 이끌어 냈기에 소외된 사람들에게 쉽게 공감될 수 있었습니다. Tocqueville 이 한때 한탄한 것처럼, 파리살롱의 가발쓴 남자들은 “실제 삶에서 거의 완전히 동떨어져”있었고 “이성으로만” 일하는 사람들이었다. 반면 루소는 전통사회에서 근대사회로 넘어오는 -시골에서 도시생활로 넘어오는 - 과정에서 진통을 겪는 사람들 에게 반응하는 울림을 찾아냈습니다. 그의 책들은 특히 연애소설 “줄리”는 동료들의 책들보다 훨씬 더 많이 팔렸습니다. 귀족의 딸이 무일푼의 젊은 가정교사와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인 “줄리”는 18세기의 베스트셀러 소설이었습니다. Damrosch의 말처럼, 그 소설이 다룬 인문들은 “촌스런 미천함으로 도시적 세련보다 더 큰 통찰력” 보였다. 인물들이 어렵게 얻은 지혜는 루소의 소설과 다른 작품들을 아우르는 주제였고 유럽전역에서 조용히 절망하던 지역들에서 만큼이나 Königsberg에 있던 칸트에게도 인기가 있었습니다.
루소는 많은 철학자들과 같은 궤도를 따르면서 Darnton이 글에서 써온 것처럼 “노후가 보장되고, 사랑받으며 완전히 상류사회에 섞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부를 증가시킬 수 있는 기회들을 거절하며 왕족의 수호를 거부했습니다. 그는 더 나이가 들고 유명해지면 또한 더 집착하게 되기도 했습니다. Hume와 Diderot을 포함해서 친구들 대부분과 자신이 잘되길 바라는 사람들과 다퉜고 많은 사람들은 그를 미친놈이라 비웃었습니다. 가장 혹독한 마찰은 볼테르와 빚었습니다. 하지만 프랑스 혁명때, 1778년에 사망한 그 둘은 시골 무덤에서 파내어져 판테온에 서로 마주보게 이장되었습니다. 사후에 붙어있게 되면서 함께 혁명의 수호신화에 이름을 올린 걸 알면 그들은 끔찍해했을 겁니다.
루소는 볼테르같은 부유한 사교모임의 무감각함에 격분했습니다. 그의 표현대로면 부자들은 “사람들이 부의 불평등을 절대 인식하지 못하게 할” 의무가 있다고 합니다. 볼테르의 최대적은 카톨릭교회와 일반적인 종교신념였던 반면 루소는 성직자의 권위에 비판적이긴 했지만 종교가 일상에서 도덕을 지키게 해주고 가난한 사람들이 삶을 인내할 수 있게 해준다고 봤습니다. 그는 주장하길 세속적인 지식인층들은 “매우 오만한 독단가들”이고 일반인들의 소박성을 경멸하며 카톨릭 성직자들마냥 편협하게 “잔인”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볼테르는 하향식 근대주의자로 전제군주를 계몽된 사람들의 잠재적인 아군으로 봤고 루소가 고대한 세상은 그런 군주들이 없는 세상이었습니다. 루소의 이상적인 사회는 스파르타였습니다. 작고, 엄격하고, 자기만족하고 열광적으로 애국적이고 강하게 국제인을 거부하는 그 이상적인 고대정치계는 오늘날 IS 칼리프 통치구역이 극단적 이슬람교도들에게 의마하는 바와 같았습니다. 루소가 본대로 자신을 남보다 위에 세우려는 악한 욕구는 스파르타에선 도시의 자부심과 애국심으로 승화되었습니다. “명백히 그런 사회에선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 멀리 있는 사람들부터 사랑한다는 사람들이 설 곳은 없었다.”
국제적 상업주의에 대한 루소의 반응은 전세계 문화 및 경제 민족주의자들의 기본 수단이 되었습니다. 폴란드의 여당인 법정의당은 E.U.에 찬동하는 “민주지식층”을 자국기관에서 제거하고 동성애혐오주의와 반유대주의를 끌어들이는데 힘을 쏟으며 “국제인들은 현실과 동떨어진 목표의무만 외치고 정작 주변의 의무는 하찮게 여긴다”라는 루소의 경고에 전율을 느꼈다. 무자비하게 멕시코인들과 무슬림들을 배척하는 도널드 트럼프의 정치적 기반은 아마도 “에밀; 혹은 교육에 관하여” “모든 애국자는 이방인들에게 엄하다”같은 루소의 글일 겁니다. “자신의 눈에 그(이방인)들은 아무것도 아니다.” 또한 폭스뉴스의 메긴 켈리나 일반적인 여성들과 난투를 벌이는 트럼프가 위안을 삼을 지도 모르는 루소의 견해를 보자면 “여성”은 “남성을 기쁘게 할 목적으로 특별 제작”되었고 “남자를 화나게 하기 보단 남자에게 살갑게 굴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한 많은 공공연한 거친 발언들로 루소하면 파시즘의 영적 대부를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많은 증거들을 보면 루소가 집단을 긍정적으로 본 건 오직 그 집단이 그 구성원들의 내면의 자유 - 마음의 자유-와 대립되지 않을 때만이었습니다. “환상”에서 그는 “나는 인간의 자유가 그가 바라는 걸 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가 하고 싶지 않은 걸 하지 않는데 있고 생각해왔다.”고 했습니다. 개인 자율성에 대한 외부제한에 대한 기본적 불신은 자연스럽게 국제무역이라는 거대하고 불투명한 힘에 대한 의구심으로 흘러갔습니다 - István Hont은 이 점인 루소와 아담스미스의 중대한 차이점이라고 합니다.
19세기 자본 제국주의 그리고 냉전 이후 경제 국제화의 승리가 대성공적으로 이룬 것은 이성적인 자기 이익추구와 결부된 전 세계적 물질주의 문명이라는 계몽의 꿈이었습니다. 볼테르는 니체가 글에서 예견한 것처럼 “승리한 지배계층과 그들의 가치판단”의 대표자로 드러났고 루소는 침통한 패배자로 보였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의 정치적 분노를 배경으로 루소는 부와 권력추구 중심으로 지어진 사회의 희생양들의 선동적인 호소를 그 어느 누구보다 더 잘 포착하고 구체화했던 것 같습니다.
루소는 정치를 지극히 개인화시킨 첫 인물이었습니다. 큰 성공을 했지만 여전히 존재하는 사회적 수직계층에서 그는 결코 안정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고 예민한 감수성으로 신랄하게 호소한 것은 평등한 권력이 주어지는 덕망있는 시민들이라는 정치적 이상이었습니다. Tocqueville이 말하는 대로 평등에 대한 열정은 “분노의 고도”로 부풀어질 수 있고 독재적 인물들과 움직임에 권력을 부여해 줍니다. 하지만 Tocqueville가 매일 읽었다고 주장하는, 바로 그 사회적으로 적응하지 못한 제네바인(루소)의 글들이 먼저 근대주의는 지식층 인맥으로 권력이 자연히 따라붙는 부당한 방식이라고 공격했습니다.
최근 봇물같이 터져나는 반감은 정치인, 기술지식층, 사업가, 은행가들 뿐 아니라 작가와 기자들까지 대상으로 하고 있고 이것이 보여주는 건 인간의 마음에 대한 루소의 역사가 정부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 사이에서 작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코뱅당원들과 독인 낭만파들은 루소의 가장 유명하고 영향력있는 제자들이 될 수도 있었지만 대도시는 악의 소굴이고 미덕은 일반인들에게 깃들어 있다는 루소의 주장은 좌파 우파 가리지 않고 우리의 불완전한 정치 및 경제체계에 끊임없이 재생되는 도전을 조장합니다. 바로 그 루소의 열등감 상처를 가진, 사회에서 단절된 사람들이 극단적 평등과 안정을 요구하면서 주기적으로 근대사회를 형성하기도 파괴하기도 해왔습니다. 앞으로 그런 사람들이 더 많을 거라고 말해도 좋을 것 같은 건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수십억 젊은이들이 진보의 소용돌이와 타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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