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쓰럽도록 낙천적인 수많은 로맨틱 코미디 여자주인공들중 브리짓 존스는 애인없을 때가 많은 30대로 영국작가 헬렌 필딩에 의해 만들어졌지만 최강 캐릭터입니다. 강하면서도 나긋나긋한 캐릭터로 현 시대의 결혼관을 고수하면서도 비꼬기도 하는 역할이죠. 첫 영화는 필딩의 시리즈중에서 각색된 2001년판 “브리짓 존스의 일기”로 “오만과 편견”이라는 책에 살짝 바탕을 두고 있는데 르네 젤위거는 악의는 없지만 적정한 냉소를 내포하고 있는 역할을 완벽하게 해냈습니다. 브리짓이 굉장히 거짓이 없다보니 전반적으로 느껴지는 효과는 모순이었습니다: 강하고 독립적이면서도 절실하게 살 빼고 사랑을 찾고 싶어하는 여성.
이런 위태로운 줄타기로도 브리짓 존스가 15년 전 굉장히 매력적이었다는 사실은 젤위거 능력을 입증해줍니다. 하지만 또한 브리짓 존스 이야기의 발판을 위해선 섬세한 구조가 필요합니다. 2004년 속편, “브리짓 존스: 열정과 애정”에서 시나리오 작가들은 브리짓의 불안에 시동을 걸면서 이야기의 재미를 영화에서 모두 없애버렸습니다: 날카로운 질투에 불타올라, 브리짓은 (제인)오스틴이 만든 이상적인 연인이자 콜린 퍼스가 연기한 마크 다시와 헤어지고 코카인을 밀수했다는 오해로 태국 감옥에 갇히고 맙니다. 그 영화가 이런 문화를 넘나드는 장면들을 그다지 잘 다루지 못한 건 1편 감독 샤론 맥과이어의 부재때문이기도 했습니다. 10년이 지난 지금, 맥과이어와 새 영화 “브리짓 존스의 베이비”의 비밀병기인 에마 톰슨도 돌아왔습니다. (톰슨은 1995년 각색작인 “센스 앤 센서빌리티”로 오스카 시나리오상을 수상했는데 그녀가 막판 수정작업을 위해 기용된 건 캐스팅 배우들이 대본에 대해 불만을 보여서였습니다.)
하지만 브리짓에게서 그녀가 비꼬던 것들, 여성은 자기 개발을 해야 한다는 외부압력을 빼면 어떤 모습일까요? “브리짓 존스의 베이비”에선 관습에 대한 압박감이 대부분 제거되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브리짓의 노이로제도 완화됬고 지난 편에 등장한 폭넓은 문화적 변동도 덜 합니다. 잡지에 나오는 충고들은 더 이상 여성 편향적이지 않습니다; 이제 섭취한 칼로리를 기록하고 강박적으로 연애할 방법을 궁리하는 것들은 촌스럽습니다. 브리짓은 대체로 자기 만족스런 자아실현의 상태에 있습니다—더 나아진, 새롭게 추가된 여성상으로 수상쩍긴 하지만 영화에서는 냉소적인 면이 전혀 없어 보입니다.
첫 장면에 브리짓은 잠옷입고 술 마시고 있는데 그녀를 상징하는 모습입니다. 그녀의 43번째 생일. 팝송 “All by Myself”가 흐르고 있고 첫 영화 첫 장면에서도 그랬습니다—그러다가 노래가 바뀌고 브리짓은 House of Pain의 “Jump Around”에 맞춰 몸을 신나게 흔들어댑니다. 우리의 용감한 여주인공은 흡연과 요요를 부르는 다이어트도 그만뒀습니다; 이따금씩 스피닝도 다니면서 감량된 체중에 만족합니다. 방송뉴스 제작자인 그녀의 직업 때문에 생긴 발표 공포증도 극복했습니다. 전 남자친구 장례식에서 (편안히 잠들길, 대니얼 클리버가 안타깝게 고인이 된 건 휴 그랜트가 영화출연을 원치 않아서입니다.) 브리짓은 활기차게 (추모)연단에 서고 그 앞에는 거의 10년 연애 끝에 이제 전 남친이 된 마크 다시와 순진한 표정의 모델들이 줄줄이 있습니다.
나중에 친구들이 그녀의 생일 저녁약속을 바람맞히면 애 돌보는 게 힘들다고 말하고 브리짓은 휴가내서 동료 미란다(약간 버릇없지만 멋진, Sarah Solemani가 맡은 역)와 함께 주말에 있는 음악축제에 갑니다. 브리짓은 밀레니엄 세대들에 둘러싸여 멋진 슬링백을 신고 비틀거리다 넘어져서 글래스턴베리 진흙탕에 얼굴부터 박게 됩니다. 그런 그녀를 구해준 패트릭 뎀시는 누가봐도 솔로들의 뮤직페스티벌에 오기엔 너무 나이있어 보이지만 나중에 잭 퀀트라는 데이트 전문가로 밝혀집니다. 그날 밤, 브리짓은 애드 쉬란 공연에서 사람들의 파도타기를 받고 술에 취해 잭의 요트로 기어들어가면서 잭은 잠재적인 아빠 후보 1이 됩니다. 후보 2도 곧바로 생겼고 브리짓이 다시 한번 그 완고한 마음을 녹인 마크 다시입니다. 두 번 다, 10년 묵은 친환경 콘돔박스에 손을 뻗다가 그만 임신이 되고 맙니다. 스토리 편의상 기쁨에 찬 그녀는 미래의 아기를 보호하고자 양수검사를 거부하면서 아버지가 누군지는 미궁에 빠집니다. 영화의 나머지 부분을 차지하는 신명나는 경쟁의 연속에서 두 남자 모두 브리짓의 아기에게 말도 안 되게 과할 정도로 정성을 쏟습니다.
“브리짓존스의 베이비"는 미혼여성들이 외곽에서 벌이는 이상한 파티같은 분위기를 풍깁니다- 여자들이 한데 모여서 두 명의 괜찮은 남자들로부터 헌신을 끌어내는 집단의식에 대한 장편 순결 판타지 연속물을 만들어내듯이 말입니다. 브리짓에 대한 마크의 사랑은 새로운 연민의 감정이 더해지며 비할 데 없이 엄숙하고 이목을 끕니다; 브리짓의 임신을 알게 된 마크가 양해를 구하고 방을 나갔다가 다시 들어 왔을 때 간신히 행복한 감정을 억누르며 말합니다. “방금 들은 말이 아마 내 인생에서 들어본 가장 훌륭한 말이지 아닐 까 싶군.” 이 말을 한 건 잭의 존재를 알기 전입니다. 한편 잭은 아직 마크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상태로 첫 데이트용 식사, 사과의 의미로 꽃, 그리고 이케아 가구를 사들고 브리짓의 아파트에 나타나며 아기가 생기기전의 관계에서도 그랬을 법한 엄청난 과시를 합니다. 그녀가 겪어야 했던 모든 민망함에 대한 보상이라고 이해해야 겠죠. 43세에 임신하면서 마침내 그녀가 항상 바래오던 행운의 주인공이 된 겁니다.
결과적으로 영화는 분명히 이상하지만 불쾌하지 않을 정도로 보수적인 성향을 띕니다. 이전에 브리짓을 움츠러들기 딱 좋게 만드는 문화였던 곳에서 이젠 그녀가, 젊지만 깊이없이 유행을 쫓는 사무실 직원들을 오히려 냉담하게 바라봅니다. 웃음포인트는 브리짓처럼 이유는 알수없지만 자신이 다소 좀 시대에 뒤떨어져 있다고 느끼는 사람들입니다. 그녀는 직장회의에서 “해쉬태그(인스타그램으로 유행하게 된 단어) 이렇게 하자!”라고 말하면서도 점심에 먹은 걸 인스타그램으로 올리는 그런 젊은 층을 매도하기도 합니다. “글램핑”과 “글래돌프 히틀러(글램핑을 브리짓 나름대로 응용한 농담)”같은 농담, 그리고 브리짓이 동남아시아계 동료의 이름을 발음하지 못하는데서 비롯되는 우스꽝스런 장면도 있습니다. 그 외는 사카린처럼 달콤한 소원성취가 이어지는 와중에 이따금씩 절묘하게 치고 들어오는 엠마톰슨이 있는데 진지한 표정으로 웃음을 자아내는 브리짓의 산부인과의사역을 맡았습니다.
브리짓 존스만의 독특한 분위기가 15년전과는 달라진 걸 지켜보는 재미가 있습니다. “브리짓 존스 베이비”이 겨냥하는 관객은 (관습을) 타파하고 평론하는 것에 질려하는, 특히 로맨틱해야 할 내용에서조차 그러는 것에 더욱 질리게 되어 버린 여성층입니다. 에이미 슈머의 “Trainweck(나를 미치게 하는 여자)"처럼 기존의 남녀관계를 뒤집으려는 시도도 질리고 길리안 로베스피에르의 “Obvious Child”처럼 낙태에 관한 정치적 이야기도 질립니다. 브리짓의 영화제작자들은 어느 정도의 브리짓 골수팬층들이 이런 내용이 없어지는 걸 갈구해왔다고 장담하는 것 같습니다: 전형적인 로맨틱 코미디, 아이러니를 털어버리고 여자주인공이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를 반드시 만나게 되는 영화. “브리짓 존스” 박스오피스는 미국내 첫 개봉주에 천만달러가 안되는데 이런 갈망이 제작사의 예상에는 미치지 못하나 봅니다. (전혀 페미니즘적이지 않은 너무 뻔한 로맨틱 코미디로 만들어진 “브리짓 존스 베이비”의 첫 주 성적을 보면 그런 로맨틱 코미디를 바라는 사람들이 생각보단 많지 않았다는 의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