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마리애니의 탁월한 신간, “멋진 하모늄: 월리스 스티븐스의 삶” (사이먼 앤 슈스터)은 박진감있는 심리이야기로 한 남자의 의기소침한 이야기로부터 시작됩니다. T. S. 엘리엇의 고통받는 사람과 창조성 사이의 분리원칙을 이보다 더 생생하게 묘사할 수는 없을 겁니다.”
스티븐스는 과도하게 몸을 사리는 내성적인 성격으로 삶의 대부분을 정장차림의 하트포드 보험사 임원으로 일했습니다.
그는 천천히 언어, 형식, 그리고 스타일을 익혀가며 눈부신 서정성을 추상적인 생각들로 감싸며 태양계와 같은 심리를 드러냈습니다.
마리애니는 설득력있게 스티븐스를 힘차면서도 정제된 표현에 능했던 릴케, 예이츠, 그리고 네루다와 같은 20세기 대표 시인들 사이에 꼽습니다.
그는 분명히 전형적인 20세기 미국시인의 특징인 회의적인 이상주의자로서 종종 날씨같은 가벼운 주제는 예언적인 엄숙함으로, 그리고 빈번하게 죽음같은 무거운 주제는 장난스런 유머로 다룹니다.
스티븐스가 처음 출간한 황홀했던 “하모늄”에는 “일요일 아침” “눈 사람” “블랙버드를 바라보는 열 세가지 방법” “항아리 이야기” “아이스크림 황제” 그리고 그의 나머지 시들의 대부분이 포함되어 있고 1923년에 출간되었을 때 그의 나이는 44세였습니다.
그의 다음 시집, “질서관념”은 13년이 지난 후 출간되었는데 아마도 가장 근사한 미국 근대시일겁니다: “키웨스트에서의 질서에 관한 생각” (이 부분엔 기자인 저도 한 표 던지는데 완벽한 템포의 미에 눈물이 다 납니다.)
그 다음 작품들이 1955년 삶을 마감할 때까지 많이 있었지만 덜 알려진 이유는 대부분 심하게 어려워서입니다; 광대한 생각이 뱅뱅 돌다 마침내 내면으로 파고드는 명상에 잠긴 자아도취.
“최상의 소설을 위한 메모” 그리고 다른 말년의 긴 시들을 이해하려면 엄청난 끈기가 필요하기에 그 당시 미국 문학계는 스티븐스에게 가능한 모든 상, 영예, 그리고 찬사를 쏟아부었습니다. 그 이후로 그의 명성은 바람받이 기념비로서 서 있었다.
마리애니도 뉴 잉글랜드의 뛰어난 시인으로 은근한 카톨릭적 성향을 보이고 있는데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즈, 하트 크레인, 로버트 로웰, 존 베리맨 그리고 게라드 맨리 홉킨스의 전기를 집필해왔습니다.
그는 문학 근대주의 뿌리와 파생에 관한 통찰력, 인용구 선택에 탁월한 취향, 그리고 주석에 재능으로 설명하려는 시인에 뒤지지 않는 표현력과 명확한 언어로 시를 풀어줍니다.
“그 모든 하모늄”의 한 페이지, 정확히 71페이지를 마리애니가 인용하면서 불꽃같은 강렬함이 뿜어져 나왔는데 그 부분은 스티븐스의 첫 출간 시집에 실린 왈츠박자의 구절로 “별의 향기”의 시작입니다. 스티븐스가 34세가 되던 1914년 작품입니다.
이야기는 그 시점까지 한 불안정한 아이가 수선스런 어른으로 성장하는 걸 보여줍니다.
그리고 나서는 스티븐스의 순수한 예술과 짐스럽게 무거운 삶 사이를 넘나들며 보여주다가 그 둘은 동전의 양면처럼 나타납니다: 철학적으로 그는 신의 죽음-그가 시로 종교를 대신하면서 치유하려고 했던 상실감-을 함축하려는 끊임없는 시도를 하고 심리적으로는 지속적이고 강박적으로 자신의 기운을 북돋으려고 했습니다.
그의 전기에 나오는 핵심문장에서 보여주듯이 스티븐스는 우울해지기 쉬운 성향이었고 “우울함을 싫어했습니다.—정말 싫어했죠.”
많은 사람들이 그렇겠지만 스티븐스처럼 집요하게 우울함과 싸우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는 삶의 안정감을 찾기 위해 일상적으로 사무실에서 하는 일들에 의존했습니다. (일에서 해방될 때는 보통 과음을 했죠.)
그는 그의 투쟁을 인간의-인간 너머의 자연과 형이상학적인-존재감의 추상적 패턴으로 그려냈습니다.
그의 말년의 시 중 하나는 시로서 위안 받으려 했던 끊임없는 고뇌를 담고 있습니다: “노래하며 잠드는 아이, / 그 마음.”
스티븐스는 1879년 펜실베니아 리딩출신으로 5남매중 둘째였습니다.
그의 아버지의 시작은 미천했으나 변호사로 성공했고 어머니는 전직 교사였습니다.
매일밤, 그녀는 아이들에게 성경을 한 장씩 읽어주었고 아이들을 장로교와 루터파 교회계열의 학교에 보냈는데 그 곳에서 스티븐스는 음악에 강렬한 인상을 받습니다.
그의 친가와 외가 모두 펜실베니아 더치(독일에서 건너온 개신교 종파)라는 사실은 어린 그에겐 의미가 없었지만 나중엔 굉장한 의미가 되어 그의 불안정한 정체성을 지탱해 줄 힘이 되었다. (그는 그의 가족 족보에 심취해서 수천의 문서를 연구했고 “매우 실망”하게 되었다고 마리애니는 기록한다. 뉴욕의 네덜란드계 소속이 아님을 알게 되면서요. 시인의 표현에 의하면 “단치히(폴란드 북부항구도시)출신 놈”이 나타나서 순수혈통을 망쳐버렸다고)
그의 엄한 아버지는 그에게 “일과 공부”만 해서 전문직을 갖으라고 강조했습니다.
스티븐스는 종종 아파서 고등학교를 1년 더 다녀야 했고 말라리아라는 말도 안 되는 질병을 한바탕 치르고는 청력에 이상이 생겼습니다.
미식축구를 하고 동네 불량배들하고 어울리면서 난폭한 면도 생겼습니다.
그러면서도 지식에 대한 그의 갈구는 깊이 있는 시, 수필 그리고 연설문에서 드러났습니다.
1897년, 그는 하버드 대학에 진학해서 고전문학 철학가인 조지 산타야나와 면밀히 연구하면서 믿음에 관한 문제를 놓고 토론도 하고 (산타야나의 은근함과 달리 스티븐스는 격렬히 회의적이었습니다) 그 주제에 관해 소네트 (14행시)도 주고 받기도 했습니다.
그는 하버드 애드보킷의 편집장이 되면서 광범위하고 심도있는 독서를 했고 프랑스어를 습득하여 유창한 어휘구사가 가능해졌고 “혼돈 감별사”에서 “진실은 꿈틀대면서라도 비늘같은 마음을 뚫고 나온다.”같은 일상적이면서도 희귀한 언어들을 짜 맞추기도 했다.
1900년, 졸업한 그는 뉴욕에 와서 신문기자가 되었다.
그가 쓴 기사에서 그는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의 두 번째 대통령 선거운동을 다뤘고 그에게 투표하기 위해 레딩 고향집으로 한달음에 달려왔다.
그의 세 번째 책 “올빼미 클로버”는 좌파 출판사에서 1936년 발간되었는데 그가 “후버를 지지하는 공화당”이었음에도 그 시대의 사회적 정치적 긴장에 대한 은근한 표현이 서툴렀고 또한 앞을 내다보기 힘든 그 시대의 특성을 고려한다 해도 지나칠 만큼 오랫동안 무솔리니를 추앙했다고 마리애니는 적고 있다.
그는 대부분의 백인들과 다를 바 없이 인종주의와 유대인에 대한 반감이 있었지만 엘리엇이나 파운드의 시와 비교했을 때 그의 시에선 그런 주제를 거의 다루지 않고 있다.
스티븐스는 시를 쓸 때만큼은 자신 안에 내재된 어떠한 비열함이나 조악함도 뛰어넘으면서도 예술적으로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다.
1900년 뉴욕 트리뷴지에서 스티븐스는 자신이 흠모하는 스테판 크레인의 장례식을 다뤘는데 그를 애도하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천한 사회적 쓰레기”라고 했습니다.
그는 사라 번하트가 불어로 연기한 햄릿에 전율을 느꼈고 나중에 “생각들이 뒤엉킨 변신”이라고 회고하면서 점점 진행중인 그의 감수성을 보여줍니다.
그는 “빠르고 불가사의한” 뉴욕의 삶에 혼란스러워져 평안을 회복하고자-믿음이 있어서가 아니라 거룩한 기운을 흡입하고자-성 패트릭 성당에 앉아있긴 일쑤였습니다.
기자생활에 싫증이 났지만 문학에서 생계의 길이 보이지 않자, 그는 아버지의 압박에 못 이겨 뉴욕법대에 진학해서 1904년 변호사 시험에 합격하고 여러 법률 및 보험회사에서 일했습니다.
또한 그 해에, 그는 엘시 케이첼이라는 리딩에 사는 여자와 격한 사랑을 하게 되는데 그녀의 가족은 “틀려먹은 구역(빈민층 지역)”에서 살고 있었다고 마리애니는 적습니다.—지금은 상투적인 표현이지만 그 당시 혹독한 사회적 운명이라고, 기차 길로 구분되던 미국 동네를 일컫습니다.
아버지가 심하게 반대하자 그는 집을 나와 다시는 아버지와 말을 섞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가 교류한 친척들이라곤 그가 연구하던 족보속의 죽은 사람들 뿐이었습니다.)
엘시는 아름다웠는데 1916년 한 예술가가 우연한 기회에 조각으로 남기게 된 그녀의 옆모습은 귀부인의 얼굴이라며 1946년 루스벨트 조각이 대체하기 전까지 칭송이 자자했다 합니다. (그 예술가의 아들은 부인하지만 마리애니는 이 회자되는 이야기를 믿습니다.)
그녀는 새침하고 유머도 없었고 9학년에 학업을 그만둬서 지적인 면에서 자격지심이 있으면서지적 호기심도 없었다고 합니다—몇년에 걸친 열애동안 그녀에게 푹빠진 스티븐스의 눈에는 이런 점이 보이지 않았고 수입이 많아지면서는 인습적으로 이미지 관리상 자신의 결혼을 정당화하기 위해 모른척 했죠. 1909년 그들은 결혼했고 웨스트 21번가로 이사했습니다.
이후 몇 년간 새내기 근대주의자들이 적지만 강렬하게 등장하기 시작했고 스티븐스가 시인으로서 자리를 잡을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월터 아렌스버그라는 부유한 인사의 살롱에서 스티븐스가 만난 사람들 중 마르쉘 투컴프와는 불어로 대화를 나누며 “물웅덩이 근처의 참새들”의 영감을 받았고 뉴저지의 소아과의사이자 명민하게 혁신적인 시인인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는 그와 필적하는 선의의 경쟁자이 되었는데 그는 스티븐스를 “멋지게 노래하는 고뇌인, 다소 은밀하게 때론 요란스럽게, 약간 뻑뻑하지만 매끄럽게”라고 평했습니다.
윌리엄스의 일상적인 자유시와 스티븐스의 기교 넘치는 무운시는 오랫동안 미국 시 형태의 극과 극으로 남아있다가 둘 다 마리앤느 무오의 작품에 흠뻑 빠지면서 어느 정도 융합이 됩니다.
마리애니가 이 기간을 서술한 부분에선 성격묘사, 일화, 그리고 아이디어들로 번쩍입니다. 칼 밴 베치튼은 스티븐스를 “도자기같은 고상한 불한당”이라고 부르며 “덩치 크고 금발에 퉁명스럽다”고 했습니다—그는 키가 186cm나 되지만 “작고 내성적인 영혼”의 소유자였습니다.
아렌스버그는 즉각 그 표현을 수정해서 “도자기로 된 불한당 코끼리”라며 스티븐스의 비사회성을 묘사했습니다. (아렌스버그가 성공적인 시인들을 위한 살롱을 운영하는 방식은 “같은 동네에 살면서 서로 사이가 안 좋은 다섯 여섯 남자들을 모으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모임은 특히 재미가 있었던지 스티븐스는 엘시에게 감히 전화는 못하고 전보를 보내서 그가 집에 늦게 갈 거라고 전하면서 동료들에게 자기는 집에 가서 무사하지 못할 거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마리애니의 한 시인에 관한 설명이 재미있는데 그 시인은 그 당시 스티븐스에게 강한 영향을 주었다고 합니다: 도날드 에반스는 자유로운 영혼으로 아름답지만 분명히 퇴폐적인 시 스타일을 가지고 있었는데 1921년 자살했다고 알려져있습니다.
“실크로 감싼 발목들을 부드럽게 모으고” 그의 전형적인 시행입니다.
에반스 적인 뭔가가—미국적 힘과 결합된 프랑스적 우아함—스티븐스의 초기 시인 “클라비어를 연주하는 피터 퀸스”에 드러나 있는데 음악과 아름다움에 관한 생각들이 Apocrypha에 실린, 욕망에 사로잡힌 장로들이 수잔나를 희롱하는 이야기에 코믹하게 엮어져 있습니다.
“그녀가 돌아섰다— / 심벌즈가 꽝 울렸다, / 그리고 우렁찬 호른소리” 그리고: “마음으로 느끼는 아름다움은 순간이다— / 변덕스럽게 뛰어대는 맥박; / 육신에선 영원하다.”
스티븐스의 몇몇 획기적인 작품들은 전형적으로 대담한 정물화와 프랑스 진보화풍의 문학적 동급의 가치를 지닙니다.
1915년 걸작인 “일요일 아침”은 무신론 영혼에 대한 논쟁으로 한 여자의 응접실에서의 백일몽으로 표현해 냈습니다.
“목욕가운이 주는 만족감, 늦은 오후 / 햇볕 쬐는 의자에서 커피와 오렌지”로 시작해서;
“대양을 건너 고요한 팔레스타인으로”를 거쳐;
“죽음은 아름다움의 어머니; 그러니 오직 그녀로부터만, / 우리 꿈이 실현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욕망도”라고 결론내고는;
결말은 “일상적인 비둘기 무리”라는 숨 막히는 이미지로 저녁에 “가라앉으며 모호한 파동을 일으킨다, / 어둠을 향해 내려앉으며 날개를 펼친다”라고 합니다.
스티븐스라는 이름으로 낸 첫 번째 시입니다: 시카고의 신생 출판사 A Magazine of Verse에서. (그는 피터 파라솔이란 가명을 수줍게 사용해왔었고 초기 시들을 낼 때, 두 이름 다 사용되었습니다.)
편집장, 해리엇 먼로는 몇 개의 연을 잘라내기도 하고 재배열하기도 했고 스티븐스는 이에 동의했지만 “하모늄”에서 원본대로 했습니다.
시인들과 편집장들간의 상호적인 횡포는 마치 미학의 근대화를 위해 필요하기라도 하듯이 그 시대의 특징이었습니다. (파운드의 “황폐한 땅”의 재편성도 일례입니다.)
윌리엄즈는 스티븐스에게 감상적인 시 둘 줄을 삭제하라고 했습니다.
“위대하고 유명해지려면 제발 내 말 좀 들어.” 그의 으름장에 스티븐스는 순종했습니다.
그러다 1916년, 엘시와 안정적인 생활을 하고 싶었던지 뉴욕을 싫어하는 그녀를 위해 그는 하트포드 손해보상 회사에 취직해서 그의 여생을 보냈습니다. 코네티컷으로 이사한 후 그는 예술공동체에서 물러났고—윌리엄즈는 “겁에 질려 물러선”거라고 보았습니다—그의 예술세계는 그의 단조로운 삶의 부업쯤으로 취급되었습니다.
7년이 걸려서야 “하모늄”을 완성했는데 그것마저 그의 많은 시들이 포함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마리앤느 무어만 그 시들을 “날카롭고, 엄숙하고 서사적”이라고 평했을 뿐 다른 평론가들은 당황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스티븐스가 “거짓 현실”을 만들어냈다고 비난의 의도로 말했지만 이것이 오히려 긍정적인 평가가 되는 셈이었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미국 제 1의 진정한 멋쟁이라고 치켜세웠지만 그것이 정작 시인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외동인 홀리가 1924년 출생한 후 몇 년 간 스티븐스는 거의 글을 쓰지 않았습니다. (먼로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는 아버지가 된다는 건 “불쌍한 문학에 끔찍한 타격”이라고 했습니다.)
그가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는 활기가 전 같지 않았고 그의 이상주의적 성향은 방향을 잃고 결코 이상에 도달하지 못했지만 코미디로 되살아났습니다.
그림을 보는 것 같은 시 “이러이러해서 그녀의 소파에 몸을 기대게 되었네”의 시작은 이렇습니다.
“그녀 옆에서 그녀의 팔꿈치에 기대어, / 이 과정, 이 환영, / 그걸 A 계획이라고 부르지.”
시의 끝은 이렇습니다, “안녕, / 파파도풀러스 부인, 고마웠소.”
스티븐스가 아침에 종이조각 위에 시를 쓰면서 사무실로 걸어오면 비서가 타이핑해주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식으로 문학저널등에 정기적으로 인상적인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한 게 1930년대이고 특히 “하모늄”에 실린 그의 시들이 종종 명시로 뽑히곤 하면서 그의 인기는 점점 늘어났습니다.
그의 친구에게 쓴 한 편지에서 그는 일이 끝나고 집에 오면 혼자 방안에 틀어박혀서 감수성과 섬세함에 방해되는 어떤 것도 차단했다고 합니다.
그의 결혼생활도 삐거덕 댔지만—엘시는 홀리가 태어난 후 각 방을 썼습니다.—이혼할 생각은 절대 없었던 것 같다고 합니다.
1932년, 그들이 새집으로 이사한 후 스티븐스는 안방을 차지하고 엘시는 하인들용 숙소에서 지내며 입주 가정부가 홀리를 돌봤습니다.
책에는 그의 다른 연애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지만 그가 로스쿨에 다닌 지 1년이 지난 여름에 만났던 한 젊은 선생에게 순수하게 반했다는 내용은 있습니다.—그녀는 완전무결하지만 영원히 가질 수 없는 대상으로 그에게 기억되었습니다.
공식석상에서 그의 태도는 거만하고 뻣뻣했지만 취하면 소년시절 허세가 다시 나왔습니다.
그런 식으로 매년 보통 혼자서 플로리다 키로 휴가 가서 맘껏 즐겼습니다.
마리애니의 설명에 의하면 1935년 키 웨스트에서 있었던 한 연회에서-스티븐스가 회사에서 담보 성실 보험 청구부서 부사장이 된 해였습니다.—취해서 로버트 프로스트를 모욕하며 그의 시를 폄하했다고 합니다. 그러고는 프로스트에게 사과까진 아니지만 화를 진정시키려는 편지를 썼는데 이에 프로스트는 다음과 같은 고상한 답변을 했다고 합니다.
“내가 다소 학구적이고 (나는 사실 좀 시골농부 같은데) 당신은 다소 고급스럽다니 잘 되었네: 그렇게 우리는 말에서 따온 말을 배열하지.”
그러나 몇 년 후 스티븐스는 다시 프로스트를 공격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로버트, 당신 글은 너무 심각한 게 문제야.”
프로스트의 답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월리스, 당신 글은 너무 구식인 게 문제야.”
1936년, 키 웨스트에서 있었던 또 다른 연회에서 스티븐스는 술에 취에 비틀대며 큰 소리로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남성스러움을 비난했습니다. 헤밍웨이가 나타나자 스티븐스는 그에게 주먹을 날렸지만 오히려 헤밍웨이에게 한방 먹었습니다. 일어나서 헤밍웨이의 턱에 강력한 주먹 한 방을 날리면서 그의 손뼈가 두 동강이 났습니다. 헤밍웨이는 바로 스티븐스를 흠씬 패줬는데 후에 스티븐스가 온순하게 사과하자 기꺼이 그 사과를 받아줬답니다.
그리고는 스티븐스가 계단에서 굴러 떨어져 다친 걸로 입을 맞추자고 했습니다.
하지만 플로리다 여행에서 스티븐스가 그런 무모한 행동들만 하고 지낸 건 아닙니다. 그 곳의 자연환경과 날씨 덕에 그는 그의 글 주제를 원대하게 맘껏 꿈꿀 수 있었습니다: 소설이 현실의 경험을 다루고 완성할 수 있는 가능성.
“키 웨스트에서 질서에 관한 생각” 56줄을 차지한 관능적인 배경설명의 최절정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그녀의 노래는 바다의 천재를 능가한다.”
글의 화자와 존재를 드러내지 않는 그의 일행은 소녀인지 여인인지 모를 사람이 바닷가에서 노래하는 걸 지켜봅니다. 그녀의 “온 몸이 펄럭대며 / 그녀의 팔은 하늘 거린다”
그녀의 노래는 “한마디 한마디 불러지고” 그 노래와 상반되는 “바다의 어두운 목소리”를 덮어버리며 만들어내는 이중창은 승리를 겨루는 대결이 된다:
그리고 그녀가 노래할 때 바다는,
그것이 뭐가 되었던지 간에 바다 그 자체가 되었다
그것이 그녀의 노래였다, 그녀가 만들어 낸 것이었기에.
마침내, 시는 존재가 없던 그림자 일행을 부르며 이름을 부여합니다, 라몬 페르난데즈.
(스티븐스는 아니라고 했지만 분명히 멕시코 외교관의 아들인 프랑스 비평가 이름을 염두에 두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그 비평가는 합리주의자로서의 편견이 있는 사람이라 시에서 시인이 직관에 대해 지지한 것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가 말합니다:
라몬 페르난데즈여, 알면 말해주시오,
왜 노래가 끝나고 우리가 마을로 향했을 때,
왜 초록 불빛이,
저기 닻을 내린 낚싯배들의 불빛들이,
내려 앉은 밤과 함께, 공중에서 너울대면서
밤을 지배하고 바다를 가르고 있는지
그리고 마침내:
오! 질서를 위한 축복받은 분노, 창백한 라몬이여,
바다의 말을 정돈하는 창조주의 분노,
향기나는 맥박, 희미한 별빛의 말,
우리자신에 관한 그리고 우리의 기원에 관한,
희미한 경계속에서 더욱 날카로워지는 소리들.
그 “소리들”은—인간의 소리에 의해 화답되어지는 바다의 깊이로—상상속의 성당안 오르간 소리처럼 울립니다.
스티븐슨의 시는 점점 더 인정받았지만—비평가 F. O. 매씨에슨은 그의 시가 늦여름 와인의 부드러우면서 톡 쏘는 것 같은 진실을 담고 있다고 했습니다.—그의 가정생활은 그에게 맥 빠질 만큼 엉망이었습니다.
홀리는 별다른 재능이 없어서 실망스러운데다 사무실 장비 수리공이자 공산당원인 폴란드인과 약혼까지 해버렸습니다. 스티븐슨은 엘시를 반대했던 자신의 아버지와 같은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는 결혼을 결사반대했고 1년 후 잔인한 남자라며 딸이 이혼하자 비로소 안도했습니다.
책 수상과 명예박사학위를 받기 위해 장거리를 오가면서도, 스티븐스는 70세가 될 때까지, 위장장애인줄 수술을 받았는데 전이된 악성종양으로 진단받은 이후조차도 계속 매일 출근했습니다.
그는 회사에서 확고한 위치에 있었지만 사람들은 그를 결코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상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다른 사람들한테 듣지 않으면 나는 그가 심장마비에 걸렸대도 몰랐을 겁니다.”
1955년 그가 죽기 전에, 병원 신부에게 카톨릭 세례를 받았는데 신부가 강권해서가 아니라 신부가 스티븐스를 그저 따뜻하게만 대해줬을 뿐이라고 합니다.
마리애니의 생각엔 영적인 회심이라기 보단 시적인 이유였을 건데 어쨌건 그가 채무보증 변호사라 그런지 끝에 나오는 점선위에 서명을 하는 경향이 있었다합니다.
다른 비평가들처럼 마리애니도 스티븐스의 직업에 대한 설명은 하지 않지만 너무 평범해 보일지 모르는 그의 직업엔 흥미로운 데가 있습니다.
스티븐스의 전문인 담보 및 신용 보상은 인간의 본성을 조심스럽게 낙관하는데 승부를 걸면서 이익을 보는 분야입니다. (담보는 불이행된 채무를, 신용보상은 직원의 잘못을 보장합니다.) 그렇게 계산된 위험부담같은 것이 그의 시 전반에 흐릅니다: 거의 의식하지 못하지만 충분히 위험스런. 결말은 시인이 엄청난 노력으로 승리를 얻어내며 평정심을 찾습니다. 그가 언젠가 한 번 설명한 것처럼 “그러는 목적은 믿을 건 자기 자신뿐인 세상에선 자기 확신이 중요해서”라고 합니다.
스티븐스가 세속적 영혼의 영웅으로서의 시인의 신화를 만들고자 노력하면서 그가 말한 자기 자신은 시간과 함께 점점 더 웅대해집니다.
1951년 작 “필요한 천사”라는 그의 수필집에서 그는 시가 철학보다 위대하다고 논했는데 자신이 아닌 다른 시인을 지명했더라면 좀 더 설득력이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마지막까지, 스티븐스의 거의 모든 시 깊숙이 그 짜여진 연주와 웅장함속에 그 어느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그 만의 목소리가 있습니다.
시의 주 목적이 미국식 영어의 영역을 확장시키고 풍부하게 하는 거라면 월트 위트만을 제외하고 스티븐스에 필적할 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비평가 블랙머는 폐어가 될 뻔 했지만 스티븐스가 살려낸 19개의 단어를 꼽아봤습니다. “fubbed속은,” “gobbet한방울,” “diaphanes다이어페인(현미경 관찰용 포매제),” “pannicles피하지방층,” “carked근심된,” “rapey강간자,” “cantilena칸틸레나(서정적 선율),” “fiscs국고,” “phylactery부족, 유물함,” “princox멋쟁이,” and “funest해악스런.”
블랙머의 말로는 스티븐스가 그런 단어들을 사용하면서 “말을 까다롭게 가려쓰기 싫어하는 사람들, 특히 말은 아름답게 들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악평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위에 나열된 단어들중 어떤 것도 정확하게 사용되진 않았다”고 합니다.
그 존재감 없던 단어 하나하나가 스티븐스에 의해 사용되어지면서 시인의 감정을 싣는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분명히, 스티븐스의 시들은 폭풍우처럼 급작스런 감정을 몰아붙이기도 하고, 수준있는 독자들마저 이해할 수 없게 난해하기도 합니다.
그 엄청난 효과를 음미하려면 윌리엄스가 말한 것처럼 “사 박자 리듬”으로 크게 읽어보십시오. “눈사람”에서 “존재하지 않는 아무것도 없음과 존재하는 아무것도 없음”을 구별할 수 있는 마음이 생깁니다.
삶에 지쳐 탈진될 때 멈춰서 마리애니의 전기를 읽으면 미학적 신비를 캐내고 인간심리의 복잡함이란 놀라운 재능을 얻게 될 것입니다.